들어가는 말 이 글은 2011년 4월 9일 인천 공항을 떠나 이스라엘 이곳저곳을 12박 13일 다닌 이야기이다. 사실 이번에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한 것도 아니고, 기행문을 쓰려고 갔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 종류로서 유학생이나 주재원 혹은 선교사처럼 장기 체류자 아니면 성지순례를 위한 단기 여행자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이스라엘을 여러 번 방문했으며, 그때 마다 체류 기간과 목적도 달랐다. 처음에는 2001년 JUC(Jerusalem University College)의 Geographical and Historical Setting of the Bible 과목의 여름 intensive course를 들으러 한 달간 체류했었다. 그 다음에는 성지 답사단의 인솔자로서 약 열흘 가량씩 두 번 방문했었다. 그 다음은 현대 히브리어를 배우기 위해 Rothberg College에서 Ulpan 초급과정 intensive course를 마치는 동안 수개월 머물렀었다. 사역 중에 있었기 때문에 장기 체류하면서 공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번 방문은 현대 히브리어를 배우러 다녀간 지 꼭 5년만의 일이었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번 방문의 주목적은 사마리아 유월절 참관이었으며, 그 다음은 성경을 가르치는데 필요한 사진자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유월절 참관은 성서시대 사마리아 연구의 한 부분이고, 교육용 사진 촬영은 강의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필요했다. 물론 렌터카를 타고 나 혼자 다니는 여행이었다. 예전에 여러 번 이스라엘을 다녀갔지만 학교 수업일정에 쫓기거나 단체로 이동하는 스케줄에 묶여 단 한 번도 방문하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방문은 이스라엘 땅을 처음 밟은 지 만 10년 만에 갖게 되는 나만의 맞춤 여행인 셈이었다. 물론 성지 순례단이 필수적으로 가는 장소들은 거의 대부분 내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이미 그런 곳은 여러 번 다녀가기도 했지만 가야 할 곳이 그 외에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방문하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 거기서 어느 부분을 꼭 봐야 하는지 모르는 채 비행기에 오르는 여행객과는 사뭇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나는 10년 동안 조금씩 꾸준히 기독교의 유대적 배경에 대해 연구해 왔고, 책이나 자료를 통해 알게 된 주요 지명들의 목록을 작성해 두었다.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장소들은 거의 전부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곳이었다. 방문하고 싶은 장소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스케줄을 빡빡하게 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12박 13일 동안 방문할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곳은 사마리아 유월절이 거행되는 그리심산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세례자 요한 관련 쪼바 동굴, 성서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네오트 케두밈, 발굴이 마무리된 다윗 성, 유대교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쯔파트, 엔게브의 닻 박물관의 순서였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로 했다. 새로운 곳을 가게 되면 좋고, 예전에 방문했던 곳을 가더라도 보충 사진 자료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었다. 갈릴리를 가게 되든 예루살렘 올드 시티를 가게 되든 내가 찍어야할 사진의 주제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 카드빚을 내어 쓸 만한 카메라를 구입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예전에 쓰던 카메라는 디카 초창기에 나왔던 모델로서 작년에 수리 센터에 갔을때 이틀만 늦게 왔으면 접수도 안 받을 뻔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수년 전에 단종된 모델로서 2기가짜리 메모리 카드만 넣어도 에러가 나서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 해상도 높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 내 여행 목적에 맞지도 않고 짐만 되었었다. 작년 말 사진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한 사람에게 그걸 미안한 마음으로 선물하고 나서 몇 달간 카메라 없이 지냈다. 어쨌거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뜻밖의 수확을 많이 거두었다. 이스라엘 현역 조각가들의 성서 인물 조각 전시회 작품들을 촬영할 수 있었던 것, 한인회 주최 쿰란 답사에 참여하여 제대로 된 설명을 듣고 제 1 동굴까지 답사한 것, 예루살렘 학회의 2011년 제 1회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귀동냥을 한 것, 로쉬 피나 정상에서 만난 유대인에게서 헤즈볼라 난동으로 아들을 잃은 이야기를 들으며 현대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등을 재확인 한 것 등… 계획에도 없던 만남을 통해 여행이 보다 풍성한 열매를 거두었던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믿는다. 어쨌거나 이번 여행이 개인적 성격을 띠다 보니 상응하는 대가도 치러야 했다. 첫째, 예전에 한 번도 직접 차를 몰고 이스라엘을 다녀본 적이 없어 길을 모른다는 점. 둘째, 현대 히브리어를 배웠다고는 하나 쓰지 않은 지 오래 되어 버벅거린다는 점. 셋째, 식사를 스스로 해결하고 다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길을 모르면 지도를 대조해가며 몇 번이든지 물어보면 되었고, 현대 히브리어는 생존과 사귐을 위해 유사시 사용하도록 아껴(?)두고 대부분 영어를 쓰면 되었고, 식사는 워낙 먹성이 좋은데다 이스라엘 음식이 내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머물렀던 한국 이스라엘 성지 연구원은 팬션 스타일 숙소여서 주방이 딸려 있었다. 동네 수퍼에서 사온 찬거리를 냉장고 한쪽에 넣어두고 수시로 꺼내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비록 목재 이층 침대 한 칸에서 잠을 자고 공용 화장실을 써야 했지만, 노트북을 얹어 놓고 사용하도록 책상 딸린 방은 내게 충분한 공간이었다. 더구나 비수기여서 2인실을 나 혼자 독방으로 쓰는 바람에 더욱 좋았다. 여행담을 책으로 펴낼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노트북에 일기를 써 내려가던 며칠 째부터였다. 만약 노트북을 가지고 가지 않았더라면 일기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는 탭 PC를 가지고 가려고 생각했지만 이스라엘에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이 거의 없다는 말에 노트북을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었다. 아마 내 생애에서 해외여행에 노트북을 가지고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무겁기도 하거니와 공항 보안 검색대에서 항상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기피 목록 1호였다. 그런데 이번에 노트북을 가지고 가지 않았더라면 일기는커녕 사진 촬영에도 큰 어려움을 겪을 뻔 했다. 사후 보정을 생각해서 사진을 Raw +Jpeg Large 사이즈 파일로 찍었기 때문에 엄청 큰 용량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가지고 간 메모리 카드는 8기가짜리 두 개, 16기가짜리 하나였다. 그런데 보통 하루 촬영하고 나면 8기가짜리 카드가 꽉 차곤 했다. 그래서 저녁이면 숙소에서 노트북에 파일 옮겨 담고, 메모리 카드의 이미지 삭제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되었던 것이다. 평소에 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번 여행에서 일기를 쓴 것은 정말로 무심코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며칠 째 사진 정리와 함께 일기를 쓰다보니까 이번 여행에서 겪은 일들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한국에 돌아오면 내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사진과 함께 여행담을 들려주어야 한다. 하지만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할뿐더러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까지 다 전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일기를 공개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 주변의 분들은 언제나 내게서 객관적 정보만을 전달 받는다. 성경의 원래 의미를 가르치는 사역을 하다 보니 내 강좌에서 일인칭 주어를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를 통해 해석된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문학, 성경 각 권과 단락의 의미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책 저 책에서 인용해 각주가 달린 딱딱한 교안만 접하게 된다. 이번 기회에 내 속에 있는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생각과 느낌을 이스라엘 여행이라는 컨텍스트를 통해 전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진리에 다가서기 원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단순히 웃음거리를 위한 만담이나 늘어놓지는 않았다. 나는 일기 형식을 통해 12박 13일로 재단된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객관적 자료와 내 느낌을 버무려 맛갈스런 교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여행 일기가 어떤 모습으로든 만들어질 수 있다면 지인들에게 큰 선물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들은 이번 내 여행을 위해 정성스레 헌금을 해주었고, 어떤 모로든 답례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노트북을 가져온 것이 너무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현지에서 작성된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기억해낸 것에 덧붙여 현지의 안내 책자들을 번역해가며 썼다. 이틀 정도의 분량만 메모를 봐가며 한국에 돌아와서 작성했을 뿐이다. 그런데 현지에서 일기를 쓰는 동안 나는 엄청난 자유함을 맛보았다. 언제나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진술하려고 참고문헌에 절대 의존하던 데서 벗어나 내 기억과 감정에 의존하여 주관적으로 쓰면 되었기 때문이다. 틀린 말을 하지 않으려고 조바심치며 긴장할 필요도 없었고, 너무 길어 산만하게 되거나 너무 짧아 지나치게 함축적이 될까봐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매일 매일 피곤한 가운데 2-3시간 글쓰기에 매달렸지만 오히려 해묵은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일기체 글쓰기가 나를 일상의 긴장에서 해방시켰다고나 할까. 나는 단순히 일상적 강의 스케줄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일상을 구성하던 패러다임에서까지 자유롭게 된 것이었다. 그 자유함에서 얻은 에너지가 고된 여정을 견디게 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1092커트의 사진을 찍었으며, 한 낮에 다윗성 답사를 마치고 힌놈의 골짜기를 왕복한 다음 다마스커스 게이트까지 걸어가기도 했고, 성서식물원의 코스를 하루에 두 개씩 사진 촬영과 함께 답사하기도 하고, 쿰란 제 1 동굴을 답사하기 위해 깎아지른 산등성이도 마다하지 않고 올랐다. 그리심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2km 정도를 걸어간 다음 사마리아 유월절 광경을 보다 생생하게 담으려고 철조망을 넘기도 했다. 그러고도 숙소에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고 일기를 썼다. 현지에서 만나 가끔 동행했던 한국 목사님 한 분은 내가 성경연구에 열심이 특심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음 번 여행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일기를 계속 쓰고 싶었지만 단 하루도 하지 못했다. 이제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번 여행에 도움을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정성으로 헌금해주신 예슈아 성서연구원 수강 회원들 및 센터 사역자들, 성복교회 수강 성도들, 항공권 예약과 갈릴리 호텔 예약을 대행해주신 핸드 투어 박찬희 권사님, 길을 묻느라 여러 번 귀찮게 해드린 성지 연구원 총무 김태훈 목사님, 쪼바 동굴 답사 예약을 대행해주시고 여러 번 귀찮은 질문에 답해주신 강후구 전도사님, 한국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누어 주셨던 성지 연구원 일층, 이층 숙박 동기 목사님 내외분, 흔쾌히 출판을 허락하신 그리심 출판사 대표 조경혜 권사님, 이번 여행을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2011년 8월 25일 송라산 기슭에서 김 인 철
피스갓 제에브(Pisgat Zeev)의 아침 4시에 잠이 깼다. 시차 때문인지 비행기에서 쪽잠을 잔 탓인지 알 수 없다.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오늘은 렌터카 찾아오고, 휴대폰 개통시키고, 시장 보는 일 외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그 정도만 하고 쉬면서 세부 일정을 잡아야 내일부터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렌터카는 유월절 기간이라 두 달 전에 예약해두었고, 휴대폰은 유심(Usim) 칩만 바꾸면 될 것 같고, 기본 먹을거리는 시내 갔다 오는 길에 수퍼마켓에서 사면 될 것이다. 오늘 아침거리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간단히 챙기면 된다. 대충 짐 정리를 끝내고 샤워하고 나자 날이 밝아 온다. 혹시 몰라 점퍼를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4월의 예루살렘 날씨답게 쌀쌀하다. 출발 전 인터넷으로 날씨를 검색했을 때 그동안 계속 비가 왔고, 구름이 낀 상태라며 이상기온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늦은 비’가 며칠 내렸던 것이다. 3월 초에 우기가 끝나고 4월 말에 본격적 건기가 시작되기 전 내리는 늦은 비는 이삭이 충분히 수분을 함유하고 영글도록 도와준다. 다음 주에 유월절이 있어늦은 비 때문에 추운 것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숙소는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팔레스타인 마을과 마주보고 있었다. 바로 건너편에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현재 아나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렘 1:1). 이스라엘 정부가 쳐놓은 시멘트 장벽이 예레미야를 감금시켰던 마른 웅덩이처럼 갑갑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 집집마다 심어놓은 정원수에 만발한 꽃들이 자태를 뽐내며 향기를 뿜는다. 집집마다 담장이 낮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담장밖에도 화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산책 분위기는 짱이다. 타민족에 대한 배려가 꽝인 유대인들도 자기네끼리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남을 의식하면서도 정작 주거문화는 자기중심적인데… 어느 집 담장 화단에 심겨진 선인장이 눈에 띤다. 아, 선인장!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국가를 상징하는 꽃이 없는 대신 선인장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척박한 기후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선인장이 모진 역사의 시련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들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대인 중에는 자신들을 선인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났다. 구멍가게 근처에 이르자 낯익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 저 건물 옆에는 미장원이 있을 텐데. 맞다, 여기는 내가 전에 살았던 집 옆 동네잖아. 이번에 머무르는 동네가 6년 전 히브리 대학에서 현대 울판 집중강의(intensive course) 들을 때 몇 달 살았던 동네와 구멍가게 하나를 중심으로 붙어 있었던 것이다. 가게에 들어서니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그 주인, 그 구조, 그 식품들, 그 냄새, 식빵 상자를 바닥에 두고 파는 방식까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할까 하다가 주인이 나를 몰라보는 것 같아 그냥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마등처럼 여러 장면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정말이지 그때는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빡센 학교 공부 따라가랴, 틈틈이 한국 유학생들 만나 귀동냥하랴, 자료 구입하러 헌책방 새 책방 뒤지랴, 외국 선교기관 방문하랴, 하루를 사흘처럼 썼었다. 그래도 배움을 향한 내 목마름이 해갈되기는커녕 더 커지기만 했었다. 십년 전 여름 예루살렘 대학에서 <성서의 지리와 역사> 과목을 들을 땐 더했다. 그때는 전국을 여행하며 수업이 진행됐기 때문에 더 정신없었다. 한쪽 어깨에 카메라 가방 메고, 등에는 책가방 메고, 손에는 교재와 필기구 들고, 더위를 이기려 연신 물을 들이키며 따라다녔다. 강의를 맡았던 미국인 교수 스티브(Steve)는 현장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한두 시간 꼭 학생들을 답사지에서 걷게 했다. 산과 골짜기의 나라 이스라엘에서 한 여름에 걷기란 장난이 아니다. 대부분 미국에서 온 20대 대학생들로 구성된 클래스에서 나는 유일한 동양인 노학생이었다. 스티브는 나를 배려해서 종종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와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광야의 절벽을 올라가는 코스에서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현기증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다 내려가도록 일어나지 못하자 스티브는 조용히 내 곁에 앉아 오늘 날씨가 흐리다는 둥 말을 걸며 원기를 되찾도록 기다려주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필름이 끊기면서 현실의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 이렇게 이스라엘을 여유 있게 다닐 수도 있구나. 현지 휴대폰과 렌터카 준비 아침을 간단히 챙겨 먹고 시내로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렌터카 픽업 시간에 늦을까봐 택시를 탔다. 벤 예후다 거리(예루살렘 올드 시티 중심가)로 가자고 한 뒤 택시 기사가 까만 양복을 입고 머리에 키파(유대인 모자)까지 쓴 걸 보고 “아타 다티?(당신은 종교인이요?”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스라엘에 살고있는 유대인을 세 종류로 나누면 힐로니(세속적 유대인), 마소레티(전통적 유대인), 다티(종교인초정통파 유대인)가 된다. 세속적 유대인은 정기적으로 회당에 출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전통적 유대인 중에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회당 출석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종교인은 신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토라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들이다. 그런 종교인들을 ‘하레딤’이라고 부른다. ‘하레딤’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서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고, 성직에만 전념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는 택시 기사가 물어올 차례. 나보고 유대인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자 기독교인이냐고 묻는다. “캔(그렇소)‘ 대답하니까 분위기가 싸해지며 대화가 끊어진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싫어한다. 굳이 십자군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들지 않더라도 유대인이 유럽에서 받은 박해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공인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숫자를 계산할 때 더하기 표시(+) 대신 (ㅜ)를 사용한다. 십자가를 연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같은 이유에서 4자도 (니)로 표시한다. 비록 잘 쓰진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예슈아 대신 예슈즈라는 말도 있다. “그의 이름과 기억이 지워지게 하소서”를 의미하는 (이마흐 셰모 뵈 지크로) 첫 글자만 모아 만든 약어인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아발 아니 오헤브 리르오트 토라(하지만 나는 모세 오경 읽기를 좋아합니다)” 라고 하자 비로소 얼굴에 화색이 돌며 웃는다. 어이구, 이런 유대인 같으니라고. 내릴 때 팁을 제대로 주자 정중히 고맙다고 인사한다. 택시에서 내려 걸으면서 생각해본다. 나는 조금 전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간격을 조금이라도 좁힌 걸까? 우선 책방에 들러 지도부터 몇 장 산 다음 근처 가게에서 휴대폰을 재개통하기로 했다. 6년 전에 구입한 카드 폰인데 서울에서 충전해보니 배터리가 살아 있지만 유심(Usim) 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 칩으로 갈아야 한단다. 그까이꺼 단말기 새로 구입하는 것보다 싸게 먹히지. 유심 칩 구입에 30셰켈, 통화시간 60분 더 채우는데 60셰켈, 도합 90셰켈 써서 현지 통화 문제를 해결했다. 이제는 렌터카를 찾으러 킹 데이비드 거리로 가야 한다. 지도 구입과 휴대폰 개통을 빨리 끝낸 탓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 렌터카 회사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날씨도 화창한데 15분쯤 예루살렘 번화가를 걷는 것도 나쁠 것 없지. 벤 예후다 거리를 거의 빠져나갈 무렵 기독교 서점이 눈에 들어온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날 수는 없다. 그리고 유리 진열대 안에서 성전 제도 관련 그림책이 뿌리칠 수 없도록 나를 유혹한다. 결국 예산에도 없던 책 구매를 신용카드로 해결하고 나왔다. 렌터카 회사는 유월절 시즌을 앞두고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예약했던 경차를 찾아 도로에 올라서는 순간 기쁨과 함께 걱정이 몰려온다. 어쩌자고 예루살렘에서 한 번도 운전해본 적이 없는 내가 지도조차 보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탄 것일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좁은 구시가지에서 비키거나 물러설 곳은 없다. 예전에 버스타고 다니던 기억을 더듬어 대충 방향을 잡고 달리다보니 피스갓 제에브 표지판이 보인다. 순간 또 한 번 기쁨과 걱정이 몰려온다. 어젯밤 합승택시 기사도 피스갓 제에브에 다 들어와서 헤매지 않았던가.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고 스스로 달래본다. 오늘 아침 빵 사러 나오면서 숙소 근처 길 이름들을 대충 외워두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장기부터 해결하기 위해 상가 간이식당에서 피타 빵으로 만든 팔라펠을 주문해서 먹었다. 그리고 수퍼에 들어가 식품들을 이것저것 샀다. 특히 유월절 기간을 대비해서 빵을 넉넉히 샀다. 유월절 기간에 이스라엘에서 빵을 산다는 것은 이론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오래 살았던 한인들 중에도 깜빡 잊고 유월절 전에 빵을 사두지 못해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제는 무사히 숙소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버뮤다 삼각 해역에 들어선 것처럼 숙소 근처에 이르자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내가 외워둔 길 이름은 나오지 않고 비슷해 보이는 길들만 자꾸 나타난다. 하는 수 없이 배낭을 메고 길에 서있던 여 군 한 명에게 길을 물었다. 이럴 땐 영어로 설명을 듣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싶어 “앙글리트?(영어 할 줄 아세요?)”라고 묻자 당황해하며 아니라고 한다. “에이크 노쓰임 레아르바임 뵈샬로쉬 하나 바블리(하나 바블리 43번지로 어떻게 갑니까?)”라고 물으니까 군인정신을 발휘해서 이스라엘제 우지 기관단총처럼 빠르고 힘차게 설명해준다. 워낙 빨리 말해서 놓친 부분도 있지만 “라다베르 요떼르 레아트 베바카샤(좀 천천히 말해 주세요)”라면서 되묻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슈네이 야샤르 야샤르 아즈 슈몰라 아즈 야샤르 야미나 아즈 오드팜 야미나(두 번 똑바로 간 다음 좌회전해서 똑바로 한 번 가서 우회전해서 한 번 더 우회전하세요)”라는 말은 귀에 남았다. 고맙다고 인사한 다음 “슈네이 야샤르 야샤르 아즈 슈몰라 아즈 야샤르 야미나 아즈 오드팜 야미나”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달리다 보니 숙소 길이 나온다. 할렐루야!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이 가슴에 차오른다. 아마 어젯밤 길 못 찾아 고생한 데 대한 보상심리와 나를 고생시킨 아랍 기사에 대한 우월감이 뒤섞인 것이리라. 일정 짜기 숙소에 돌아와서 이층 목사님 부부와 인사를 했다. 안식년으로 이스라엘과 유럽 여행을 막 시작한 분들이라면서 내 여행 계획을 듣더니 같이 다니고 싶어 했다. 자기들도 차를 빌려놓았기 때문에 동행하는 편이 힘이 될 거라고 한다. 목적지만 같다면 나로서도 나쁠 것 없다. 특히 사마리아로 올라갈 때는 군사가 필요하다. 흔쾌히 내일부터 몇 군데를 같이 다니기로 합의를 보았다. 연구원 총무 목사님에게 지도를 펴놓고 꼼꼼히 길을 물어 전체 여정의 윤곽을 잡아보았다. 만약 호텔이나 민박집에 머물렀다면 이런 도움을 얻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속이 출출해서 라면 하나 먹고 나니 초저녁인데 벌써 잠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제 시차적응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는 생각에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샤워는 하고 자야할 텐데 마음 뿐이다. 그래도 오늘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아쉬움은 없다.
들어가는 말 첫째 날 4월 9일 인천에서 텔아비브로 인천공항 벤 구리온(Ben Gurion) 공항 셰루트 택시 둘째 날 4월 10일 답사 준비 피스갓 제에브(Pisgat Zeev)의 아침 현지 휴대폰과 렌터카 준비 일정 짜기 셋째 날 4월 11일 다윗 성 선잠 다마스커스 게이트와 시드기야 동굴 다윗성 1. 전망대 2. 거대한 석조 건물 잔해 - 다윗의 왕궁 3. 왕의 구역 A. 계단 모양의 돌 구조물 B. 아히엘의 집 C. 불탄 집 D. 공문서 인장의 집(house of bullae) E. 느헤미야 성벽 4. 고대 무덤들 전망소 5. 워렌의 수갱 장치(Warren's Shaft System 6. 비밀의 터널 7. 가나안 사람들의 못과 요새와 망대 A. 가나안 사람들의 못 B. 요새 C. 망대 8. 기혼 샘 9. 가나안 사람의 터널 10. 히스기야의 터널 11. 고대 예루살렘 성벽 12. 다윗의 무덤 13. 메유하스의 집 14. 세 골짜기 전망대 15. 실로아(실로암) 못 16. 순례자의 길-서쪽 계단 길 17. 비잔틴 시대 실로암 못 18.작은 기적 넷째 날 4월 12일 네오트 케두밈-성서 식물원 1. 야생무화과 2. 밀과 보리 3. 타작마당 4. 도금양 - 화석류(myrtle) 5. 아몬드 6. 올리브 기름 틀 7. 포도주 틀 8. 올리브 나무 9. 우슬초(hyssop) 10. 합환채(mandrake) 11 호두나무 12. 가시나무 13. 무화과나무 다섯 째 날 4월 13일 쪼바 동굴과 헤로디온 쪼바 동굴 헤로디온 갈릴리 여행 준비 여섯 째 날 쯔파트 가는 길 2박 3일 와디 에 달리에 베이트 알파 회당 쯔파트 일곱 째 날 4월 15일 갈릴리 일대 로쉬 피나(Rosh Pina) 벤 자카이 무덤과 닻 박물관 저녁 식사 여덟 째 날 4월 16일 예루살렘으로 아홉 째 날 4월 17일 종려주일과 사마리아 유월절 종려주일 사마리아 유월절 열 째 날 4월 18일 유대인의 유월절 세데르 투 베슈밧 열하루 째 날 4월 19일 쿰란 답사 공동체 유적 제1동굴 열이틀 째 날 4월 20일 아이눈 답사와 예루살렘 학술대회 아이눈 답사 예루살렘 학술대회 열사흘 째 날 4월 21일 막내림 답사 준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총신대 신대원 졸업, Montana에 있는 YWAM SBS 과정 수료 Jerusalem University College의 Geographical and Historical Setting of the Bible 과정과 Paul and Hellenistic World 과정 이수, Hebrew University Ulpan에서 modern Hebrew 연수. 현 예슈아 성서연구원 대표, 한국 이스라엘연구소 연구위원 저 서 성경핸드북(엠마오), 책별성경연구 교사용, 학생용(엠마오) 유대문화로 읽는 복음서의 난제들(1) (그리심) 세례자 요한(그리심)
